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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 남쪽에 세워진 뒤 2개월 만에 일어난 여순사건은 1946년 미군정 하에서 일어났던 ‘대구10월항쟁’이나 1948년의 ‘제주4.3항쟁’보다 훨씬 더 큰 정치·사회적 영향을 남한 사회에 미쳤다. 특히 반이승만 정치 세력에 대한 지배 정권의 공세는 여순사건을 계기로 급속하게 강화되었고, 한반도 남쪽을 지배했던 미군의 철군 정책도 변화되었다.

이러한 여순사건의 결과로 이승만의 장기 독재가 이어졌고, 군대의 사회․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30여 년간 군부독재 정권의 토대가 되었다.

 

 

  국가보안법 제정

 

여순사건 당시 관계자들에게 적용한 국방경비법을 기초로 하여 현재까지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악법인 국가보안법이 1948년 12월 1일 제정되었다. 국회는 반대파를 관제 공산당으로 몰아 처벌할 수 있다는 소장파 국회의원들의 우려와 강력한 반대를 뿌리치고 여순사건 뒤 한 달 보름 만에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1949년 1월부터 9월 말까지 형무소에 수감된 사람 중에서 80% 이상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감되었으며, 국가보안법은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반공 국가를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법적 제도이다.

 

 

  군대의 사회·정치적 영향력 강화

 

여순사건으로 인해 국군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초로 당시 전 병력의 1/5인 5,000여 명의 병력이 투입된 군사합동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를 통해 대규모 연합작전의 경험을 익힌 국군은 국방경비대 시절, 경찰에 억눌려 지내던 상황에서 완전히 벗어나 경찰뿐만 아니라 전 사회에 압도적인 규정력을 갖게 된다. 여순사건을 진압한 군대의 사회적 영향력은 곧바로 정치적 영향력으로 확대되면서 이후 30여 년간 지속된 군부 독재정권의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다.

 

 

  주민통제체제 실시

 

여순사건을 철저하게 진압한 이승만 정권은 국제공산주의 세력과 북한의 침략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11월 초에 극우 인사들을 포함한 반이승만 세력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한편으로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한 주민통제체제를 하나씩 만들어가기 시작하였다.

1949년 1월에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호국군’을 편성해 4개 여단을 창설하였고, 각 학교에는 군 장교가 파견되어 준군사조직인 ‘학도호국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1949년 4월에는 좌익들을 선도하고 회개시킨다는 명목으로 관제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하였다. 1949년 6월에는 가구 구성원 외에 다른 사람이 집에 머물면 경찰서에 반드시 신고하도록 하는 유숙계(留宿屆)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민간인 학살의 서곡

 

여순사건과 제주4.3항쟁에 대한 진압과 토벌은 2년 뒤에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자행된 민간인 집단학살의 시작과 서곡이 되었다. 우리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민간인 집단학살이 여순사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제주도로 이어졌고, 여순사건과 제주4.3항쟁의 진압과 토벌 과정은 그야말로 진압군의 전과물로 여겨지면서 민간인 학살이 경쟁적으로 악용되었다.

이로 인해 여순사건에서 나타난 유혈적 갈등과 민간인 학살의 양상은 2년 뒤 한국전쟁에서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민간인 학살이라는 악용된 사례가 우리 사회 인권을 말살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역공동체 파괴

 

여순사건은 지역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쳐 지역공동체가 파괴되었다. 14연대 봉기군이 들어왔을 때는 우익인사와 경찰들에 대한 처형이 이루어졌고, 진압군경의 진압 작전 때에는 협력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는 좌익 인사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 과정에서 개인적인 원한으로 협력자를 지목하여 처형하는 바람에 지역사회 공동체는 산산조각이 났다.

이때부터 지역에서는 ‘레드콤플렉스’로 인해 ‘나서면 다친다(=생명을 잃는다)’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지역의 개혁·진보적인 사회운동이 40여 년간 싹이 잘려 버렸고 이데올로기에 일부러 냉담한 태도가 번져 보수적인 도시가 되었다. 향후 미래 세대와 지역 공동체를 위해서도 유족 쌍방 간의 진정한 화해와 상생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반공 국가 형성

 

여순사건 이후부터 죽은 사람들이 아무리 죄 없이 죽었다고 해도 ‘빨갱이’라는 죄로 죽었다면, 그 누구도 더이상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심지어는 여수, 순천지역 출신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여순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반공 국가 형성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우리 사회의 반공 국가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고정화되고 강화되었다. 여순사건과 이후의 한국전쟁은 우리 사회에서 반공체제가 작동하는 원형을 만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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